직업탐구
어느 스타트업 OL의 수요일 오후
신수낭
어느 스타트업 OL의 수요일 오후
신수낭
OL은 오퍼레이션 리드(Operation Lead)의 약자로, 존재하는 말이긴 하지만 사실 필드에서 흔히 쓰이는 말은 아니라고 합니다. 제목에 ‘오퍼레이션 리드’를 다 욱여넣기 곤란해서 요행을 부렸습니다.
새벽 1시를 넘기면 결국 2시까지 핸드폰 들여다보다 잘 것을 알잖아. 더 늦기 전에 얼른 핸드폰 화면을 꺼. 스스로에게 읊조리며, 얼마 전 성재가 말해주었던 상사의 일화를 떠올린다. 중요한 외부 미팅에 지각하고선, 하는 말이라는 게 게임을 하다가 늦게 잤다는, 변명이라기에도 민망한 소릴 뻔뻔하게,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했다지. 한심한 인간이라고 혀를 끌끌 찼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간신히 잠을 청했다.
조금 일찍 출근해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드립 커피도 한잔 내려 마시고,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아침형 인간이 되기는 오늘도 글렀구만. 생산적인 아침에 매번 실패하는 나를 자책하며 출근 준비를 마친다. 올해 여름 받았던 심리상담을 떠올려본다. 내가 원하는 이상과 실제 행동의 괴리가 있다면, 그건 사실 내가 진짜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 걸까? 그만큼 간절하지 않은 걸까?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정말 하고 싶은 일은 하게 되어있다는, 어느 거장의 말을 떠올리며 빠른 걸음으로 서울숲을 통과한다.
이십 분 남짓한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얼마 전 산 이북 리더기를 꺼낸다. 나름 거금을 주고 샀으니 돈이 아깝지 않게 다독가가 되어야지. 요즘 읽고 있는 책의 구절들을 곱씹으며, 회사에서의 하루를 알차게 보내리라 다짐한다. 점심시간까지 2시간 반. 팀 정기 미팅은 11시. 우선 어제 하던 일 마무리하고, 오늘 할 일 좀 생각해 보고, 바로 답장해야 하는 메일들은 없나 체크하고. 아, 오늘 읽은 책에서 "메일 확인은 나중으로 미루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라"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러기엔 밀린 일들이 너무 많은걸? 어제의, 그저께의 나를 탓해야지 뭘.
11시 팀 정기 미팅은 짧게는 5분, 길게는 30분이 걸릴 때도 있다. 매일매일 업무 진행 상황을 모두에게 공유한다. 개발자 A가 먼저 업데이트 사항을 설명한다. 이번 주 업무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나 귀를 쫑긋 세운다. 비개발 직군의 숙명이다. 모르는 건 열심히 메모해 놓고 GPT에게 물어본다. 어느새 내 차례가 돌아왔고 나는 얼마 전 일본 콘퍼런스에서 미팅을 진행한 잠재고객사에게 보낼 자료와 다음 주에 예정된 오픈이노베이션① 미팅 준비를 하고 있다고, 간략하게 말했다.
12시, 하루 중 가장 쓸데없지만 어려운 고민의 시간이 다가온다. 바로 점심 메뉴 고르기. 회사 근처 칼국숫집에서 아주 매운, '터진만두뚝배기'를 먹고, 다른 팀원들을 먼저 사무실로 올려보내고, 아주 빠르게 식후땡을 한 뒤 양치하고, 자리에 앉는다. 식곤증이 올 것이 분명하니까, 얼마 전 대표님이 잠시 한국에 들어왔을 때 사놓고 간 드립커피 장비들로 커피도 한잔 내려본다. 나는 카페인에 영 무딘 체질이지만, 이 카페인이 어쩌면 아침에 마신 박카스랑 같이 시너지를 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쉬운 시간이라, 상연이 선물한 뽀모도로 시계도 켜본다.
오퍼레이션 직군에 속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잡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발자, 마케터, 디자이너처럼 뚜렷하게 업무가 구분되기보다 회사 전반의 운영과 더불어 영업·마케팅, HR(인적자원 관리)과 같은 다양한 업무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 규모가 커지면, 오퍼레이터의 직무도 뚜렷해진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아직 초기 스타트업이므로, 회사 운영을 중심으로 GTM②, PM(프로젝트 매니저) 역할 또한 함께하고 있다. 나무보다 숲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오퍼레이션 업무는 보다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다. 혹시나 놓치고 지나가는 건 없는지, 숫자에 영 흥미가 없지만 작은 오차도 발생하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필요한 서류들을 잘 갖춰놓고,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들이 그러하다. 동시에 회사 운영의 큰 그림을 보기도 한다. 앞으로 예산은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어떤 사람들을 뽑고, 어떤 시기에 어떤 마일스톤을 설정할 것인지, 고객들이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줄 수 있을지,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뭘 해야 하는지 현실에 발을 붙여놓되, 숲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처럼 생각을 무한정 이어 나간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의 조합 속에서 어떤 우선순위를 가지고 내가 가진 자원을 활용해야 하는지, 나아가 이 고민은 개인의 삶으로도 확장된다. 지난 직장에서도 스페셜리스트보다는 제너럴리스트로 일했으니 사실 어찌 보면 이게 내 적성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자질은 어떤 걸까? 독보적인 제너럴리스트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고민이 내내 따라온다.
보통 월초, 월말에는 회사 운영과 관련된 업무들이 많지만 지금은 중순이니 GTM과 관련한 업무를 끝내볼 작정이다. 일본 시장은 우리가 최우선으로 타깃하는 시장은 아니지만, 가능성을 알아보는 중이다. 기존에 만들었던 회사 소개서, 세일즈 덱 같은 것을 일본 시장에 맞는 통계와 문제로 내용을 조금씩 수정하고 덱에 들어가는 문구들도 일본 B2B③ 영업 톤에 맞게 바꿔야 한다. GPT와 클로드 덕분에 한결 업무가 쉬워지긴 했지만, 한글과 영어로 작성한 내용들을 익숙지 않은 일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혹시나 실수가 있을까 봐 몇 번이고 확인 작업을 거친다. 나는 아직 AI를 100% 신뢰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고마워, 얘들아.
변경된 문구들의 확인 작업이 끝나면 피그마④에 만들어놓은 덱의 모든 텍스트를 갈아 끼운다. 머리가 복잡할 땐, 이런 노가다 작업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 즐겁지 않아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냥 한다. 더 좋은 프레이즈, 슬로건, 영업 멘트가 있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면서도, 기획과 실행의 균형을 생각하며 의심을 거두고 우선 작업을 마무리한다. 하, 이제 메일을 보낼 시간. 마찬가지로 일본 영업 톤에 맞게 번역을 거치는데, 한글 작성–일본어 번역–수정– 최종 검수–실제 메일 발송까지 꽤 시간이 많이 든다. 반복되는 업무들을 어떻게 하면 공을 덜 들이고 자동화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워크플로우 개선이 필요한 업무들이 잔뜩이지만, 연말에 한 해를 회고하면서 해야지, 우선은 미루기로 한다. 회사 이름, 메일 주소, 첨부서류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발송 버튼을 보낸다. 제발 답장을 주세요, 여러분.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펑크가 나서는 안 되는 오퍼레이션 잡무들이 밀려들기도 한다. 정부 지원사업에 필요한 온갖 행정 서류들을 보고 있자면 그 지독한 비효율성에 살짝 열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세상에 공짜 돈은 없으니 투덜대지 말고 하자, 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는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일에 가장 많은 시간과 집중력을 투입하라"라고 하던데, 나는 집중력이 영 떨어질 땐 이런 노가다 업무로 잠시 도망간다. 귀찮지만 나의 소중한 도피처가 되기도 하는 잡무들. 이를테면 간식 주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잡무다. 가장 싫은 건 윈도우 노트북을 켜서 처리해야 하는 잡무들이다. 공인인증서와 각종 보안 프로그램의 향연. 보기만 해도 컴퓨터가 오염되는 기분이다.
이번 주는 특별한 업무가 하나 더 있는데, 회사 1주년 기념 겸 연말 저녁 식사 자리를 기획하는 것이다. 이십 대 때는 사람들 모아서 밥 먹고, 서로 소개해 주고, 파티하는 게 그렇게 즐거웠는데 이제는 그럴 기력이 없다. 그래도 기왕 하는 거 기깔나게 해야지. 강남역, 역삼역 근처에 단체석이 있으면서 어느 정도 독립된 공간이며, 음식 맛과 가격대가 합리적이면서 우리가 원하는 날짜에 예약이 가능한 식당들을 찾아야 한다. 친구들과 팀원들의 집단 지성을 빌려 전화를 돌리고. 파티풀Partiful⑤로 초대장을 만들고, 회사 소개를 어떻게 해야 재미있을지 머리를 굴려본다. 한 해 동안 도움받았던 파트너사, 인턴 친구들, 그리고 팀원들의 주변 지인들을 초대하는 자리다.
대표님은 스타트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안정성이나 여유를 쉽게 약속할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대신 그 선택은 혼자만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으며, 주변의 이해와 응원, 말없이 곁을 지켜준 사람들의 신뢰 위에서 비로소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이번 자리에는 그 시간을 함께 건너온 지인들도 함께 초대할 예정이다. 각각 다른 그룹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을 우선 써 내려가고, 이 와중에도 개발자 채용에 도움이 될 만한 지인들이 누구 없을지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훑어본다. 개발팀에도 회사에 데려오고 싶은 지인 개발자들에게 꼭 초대장을 전달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전화를 마저 몇 통 돌리고, 메일함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다. 식사를 어떻게 할 거냐는 개발자 A의 물음에 "저는 재전(재택전환)하겠습니다~ PT도 하러 가야 돼요…" 하고 우는 소리로 대답한다. 지난번에 밥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하다가 토할 뻔한 적이 있으니 배가 고파도 참아야지. 개발자 A가 셀렉스 프로틴을 건넨다. 착한 사람이야 정말. PT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그때까지 사무실에 좀 더 남아있기로 한다. 다들 저녁을 먹으러 자리를 비운 고요한 사무실. 유튜브 뮤직에서 음악을 켜고,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혼잣말하기도 하며 남은 업무들을 이어간다. 중간중간 뉴스 기사를 확인하고 밀린 카톡에 답장도 하고, 인터넷 쇼핑도 하다 보면 어느덧 이동할 시간이다.
운동을 마치고 나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배달 앱으로 저녁 식사를 주문한다. 씻고 나와 밥을 먹고, 오늘 마치지 못한 혹은 어제 마치지 못한 일들을 생산성이 조금 떨어진 상태로 마무리하려고 노트북을 펼치겠지. 그러고 나서, 오늘은 진짜 일찍 자야지. 내일 상쾌한 기분으로 고요한 사무실에 출근해서 나의 하루를 뿌듯하게 시작해야지. 매일매일 혹은 시간마다 달라지고 새로 추가되는 다양하고 복잡한 업무들, 그 업무들을 처리하는 하루하루에서 나만의 흐름과 중심을 찾는 시간이 그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과연 나는 오늘 일찍 잠에 들 수 있을까?
① 오픈이노베이션: 개방형 혁신. 기업 혁신을 위해서 내부 자원뿐만 아니라 외부 자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 보통 대기업들이 스타트업, 대학 연구소 등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도입하거나, 자금을 투입해 함께 연구를 진행하는 등의 협업을 진행한다. ② GTM: Go to Market의 약자. 말 그대로 '시장/고객에게 가자'라는 의미로, 마케팅, 영업 프로세스 및 전략을 세우고 활용해 고객에게 도달하는 일을 말한다. ③ B2B: Business to Business의 약자로, 주고객이 소비자(Consumer) 개개인이 아니라 회사인 영업방식을 뜻한다. ④ 피그마: 웹 기반의 프로토타이핑, UI/UX 디자인 협업 툴. ⑤ 파티풀: 구글 선정 2024 올해의 앱에 선정된 미국의 초대장 제작 서비스. 무료에다 귀여우니까 많이들 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