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 2026. 01.

스테이플스

픽션 앤 프랙티스: 결핍 워크숍 프로토콜

마지 (월간차지 편집부)



현대의 웰니스 산업은 두 개의 모순된 명령을 동시에 판매합니다.

     한쪽에는 강박적 자기계발 담론이 있습니다. 깨진 것은 고쳐야 하고, 모자란 것은 채워야 하며, 부족함을 수치로 환원하여 회사 밖에서도 스스로 KPI에 시달리게 합니다. 생산성 앱, 노션과 슬랙과 옵시디언, 해빗 트래커... 완전함은 어느덧 구매 가능한 상품이 되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둔감한 상태의 당신만을 완전한 존재로 간주하는 피상적 자기수용 담론이 범람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너도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돼, (물론 이 말들은 어느정도 사실입니다)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열심을 놓아버리라고 회유하는 힐링 콘텐츠가 피드를 점령하고, 감상적인 위로는 알고리즘에 의한 최적화 경로로 기진맥진한 당신 앞에 도착합니다. 이는 개선 강박의 반댓말이 아니라, 그것의 또다른 형태에 불과합니다. 모두 문제를 직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킨츠기(金継ぎ)는 이 이중적 웰니스 세계의 완벽한 상징입니다. 깨진 도자기에 금을 발라 ‘더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이 일본의 수리 기법은 한편으로 상처의 미학화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완전함의 낭만화입니다. 모두 결핍을 바느질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문제는 이 상징이 언제나 개인에게만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사금파리 상태의 내가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할 새도 없이, 깨진 이유와 깨진 상태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만을 개인의 과제로 남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목할 것은 결핍된 상태 그 자체입니다!

       셸 실버스타인의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The Missing Piece』(1976)에서는 진작에 오늘날 세상을 호령하는 두 가지 거짓말을 간파한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완전해진 동그라미는 노래할 수 있는 입을 잃게 되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동그라미’가 다시 조각을 뱉어버린 후에 “깨진 채로도 괜찮아” 같은 자기계발적 힐링송을 노래하던가요? ‘동그라미’는 조각이 없던 시절에 좇던 것을 다시 좇으며 더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와서 페이지 한가운데 놓습니다. 완전함과 불완전함 사이의 선택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라는 것이죠.



공간차지의 첫 번째 프로그램 ‘픽션 앤 프랙티스’의 첫 세션, 결핍 워크숍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에게 개선도 수용도 제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의 행위에는 개입하지만 생각과 결정은 혼자서 해야 합니다. 몸과 행위의 차원에서 발생한 생각의 다발들을 스스로의 입, 머리, 눈으로 결론내어야만 의미가 생긴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프로토콜:
참가자들은 각자의 유년기에서 중요했던 책 한 권을 가져옵니다. 집에 남아있다면 그것을 가져와도 되고, 판본이나 중고서적을 구해 가져와도 됩니다. 개정판보다는 최대한 내가 읽었던 인명과 번역이 유지되어 있는 버전을 찾아보세요.

모두가 함께 소리내어 읽습니다.

여섯 살의 내가 이해하거나 감지했던 것을 지금의 나는 어떻게 읽는지 확인합니다. 그 간극에서 무엇이 보이는지 말해도 되고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간극이 없어도 됩니다.

책을 다 읽은 후, 참가자들은 플라스틱 모형을 밟거나 쪼개서 깹니다. 금가루는 준비되지만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깨진 조각은 단지 배열되고 사진으로 남게 됩니다. (그냥 기념 사진입니다!) 치유하거나 포기하는 행위로 귀결시켜 모종의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저 그림책을 읽고 오브제를 깨고 그 형태를 보는 시간입니다.
완벽주의가 생산하는 번아웃과 자기수용이 은폐하는 회피 사이에서 떠올릴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결핍은 메워져야 하는가? (아니다)
       결핍을 그대로 두어도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레오 리오니가 이미 알려주었다)

유년기에 읽었던 책은 이미 이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읽는 법을 잊고 있었을 뿐입니다. 픽션 앤 프랙티스 첫 번째 세션 참여를 원하신다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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